도시빈민·노동자··중국동포와 함께 한 주민교회 30년 뉴스-기독교

민중교회로 성공하는 법, "더욱 낮게"
도시빈민·노동자··중국동포와 함께 한 주민교회 30년
입력 : 2003년 02월 26일 (수) 00:00:00 [조회수 : 226] 주재일 ( 기자에게 메일보내기 )
▲주민교회가 시작한지 30년이 됐다. 그 동안 민중교회라는 이름을 그대로 지켜오면
서 힘들고 가슴아픈 사연도 많았다. ⓒ뉴스앤조이 주재일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세 번을 다녀왔습니다. 몇 년이 지난 뒤 돌아오면 가진 것이라고는 자기 몸밖에 없는 사람들만 남아서 '빨갱이 교회'라는 수난을 견디고 있었습니다. 연탄장수, 이발관 사장, 구멍가게 주인 등은 온 데 간 데 없었습니다. 잘나고 똑똑한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불의한 세상을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이 조금씩 바꾸어갑니다. 30년 주민교회 역사가 보여주는 사실입니다."

이해학 목사(59)는 30년 동안 주민교회가 민중교회로 남을 수 있었던 이유를 자신의 감옥행에서 찾았다. 그가 한 번씩 감옥에 갔다온 사이에 '자기 것'이 있는 사람들이 숱하게 교회를 떠나갔다. 그러나 이 목사는 그들을 원망하지 않았다. 정부의 탄압이 얼마나 집요한지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교회에 남은 사람들은 노동운동 하다 죽은 자식을 둔 부모, 정부와 공장의 블랙리스트에 올라와 있는 노동자들,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쫓겨온 학생 등 민주화가 안되면 살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주민교회는 이들의 피난처였고, 합법적인 운동의 공간이었다.

지역 섬기는 교회로 출발

주민교회는 1973년 3월1일 성남시 수진동 허름한 '슬레이트 집'을 전세로 얻어 문을 열었다. 주민교회의 전신은 월요교회(권호경 목사)다. 이해학 목사가 담임하면서 주민교회로 바꿨다. 월요교회는 노동·빈민 운동가들이 매주 월요일에 모이는 교회다. 합법적으로 모이기 위한 보호막으로 교회라는 외피를 썼던 것이다.

이해학 목사는 겉모양만 교회인 월요교회를 신앙 공동체로 바꾸어갔다. 운동가와 빈민·노동자가 함께 성경을 공부하고, 신앙 생활을 훈련했다. 74년 주민교회에 큰 시련이 닥쳤다. 이 목사가 유신에 반대하다 긴급조치 1호로 15년형을 선고받았다. 이 목사는 1년만에 출옥했다가 이듬해인 76년 다시 긴급조치 9호로 3년간 옥살이를 했다. 문익환 목사가 건네준 '민주구국선언문'을 유포했기 때문이다. 이 목사가 감옥에 있는 동안 주민교회는 정부의 탄압을 피해 수 차례나 도망 다녔다. 정부의 탄압을 피해 도망 다닌 것이다. 그러나 정보부 직원과 경찰들을 피할 길이 없었다고 한다.

이 목사가 출옥하자, 주민교회는 다시 활기를 띠었다. 우선 의료협동회를 조직됐다. 의료협동회는 가난한 사람들의 힘으로 운영되는 병원을 세우려고 했다. 그러나 이 지역 병원 업자들의 방해로 끝내 무산됐다. 주민교회는 방향을 돌려 빈민들을 위한 신용협동조합과 생활협동조합을 만들었다. 이 운동들은 지금까지 이어져 신협 조합원 400여 명, 생협 조합원 1,500여 명이 활동하고 있다. 이들은 환경운동에서 대안교육운동까지 다양하게 활동 영역을 넓혀 나가고 있다.

주민교회는 이외에도 노동자 야간학교와 직업상담실을 개설하고 실업대책위원회를 운영했다. 야간학교는 노동법을 비롯해 한문과 영어, 역사와 상식 등을 가르쳤다. 여기서 활동하던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들어 교회로부터 독립했다. 이 목사는 빈민운동과 노동운동, 시민운동이 교회를 떠나가는 것이 기쁘다고 말한다. "각 운동이 성숙해서 사회가 민주화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입니다. 교회는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발버둥 쳐서는 안됩니다. 더 낮은 곳에서 교회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찾아가야 합니다."

외국인노동자 선교는 빚 갚는 일

▲주민교회가 가장 적극적으로 하고 있는 외국인노동자의 집과 중국동포의 집.
ⓒ뉴스앤조이 주재일

80년대 주민교회의 관심은 통일로 모아졌다. 주민교회는 광주민주화운동을 통해서 우방으로 알았던 미국도 철저하게 자기의 이익을 위해 움직였다는 국제질서의 냉혹한 현실을 배웠다. 또 우리 나라가 겪고있는 질곡이 분단과 깊게 연관됐다는 것도 그 때 알게됐다. 86년 6월 항쟁 때는 주민교회가 맨 앞줄에 섰다. 성남지역 행사를 기획하고 경찰 교섭까지 주민교회가 맡았다. 이 목사는 90년대 초반 전민련 조국통일위원장, 범민련 집행위원장을 맡는 등 통일운동에 깊게 개입했다. 이 목사는 범민족 대회를 위한 회담을 위해 베를린에서 북한 측 실무자를 만났다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됐다. 1년 6개월을 다시 감옥에서 살았다.

이 목사는 일명 '남산'에 끌려가 죽도록 매를 맞았지만, 국가의 탄압은 힘들지 않았다고 한다. 이 목사는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웃들이 주민교회를 이상한 집단으로 매도할 때는 견디기 어려웠다고 털어놨다. "목회자들도 주민교회를 성남에서 쫓아내야 한다고 시위했어요. 그 중에는 기장 교단의 목사도 있었습니다. 82년 4월19일 사회선교협의회가 발표한 '성명서'를 내고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 미국의 책임을 묻자, 성남애국반공결사대원이 주민교회 추방운동을 벌였습니다. 당시 애국결사대원 가운데 상당수가 현재 성남에서 정치인과 사회운동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 목사는 민중교회들, 특히 젊은 목회자들이 90년대 중반부터 '민중'이라는 이름을 버리는 것이 못마땅하다고 했다. 이 목사는 90년대 민중교회들이 어려웠던 것은 민중신학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했다. 오히려 그들이 가난한 사람들의 현실에 좀더 깊게 들어가지 못한 점을 성찰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주민교회의 경우, 90년대 중반 성남 지역의 외국인 노동자와 중국동포들의 인권을 위한 운동을 시작했다. 이들은 노동조합도 돌아보지 않는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었다. 이 목사는 "주민교회는 독일 서남교회가 750만 마르크를 지원해줘서 교회를 세웠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갚을 때입니다"고 말했다.

"통일·민주화운동은 끝나지 않았다"
주민교회 30돌 축제 한마당…3월 1일 성남 시민회관서

▲"주민교회는 앞으로도 통일
운동, 생명공동체운동, 민주화
운동을 지속적으로 펼쳐갈 것"
ⓒ뉴스앤조이 김승범
주민교회(이해학 목사)가 3월 1일 교회 세움 30돌을 맞아 축하잔치를 마련한다. 주민교회는 70년대는 독재에 항거하며 빈민운동을 펼쳤고, 80-90년대는 통일운동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90년대 중반부터 외국인 노동자들과 함께 지구촌 생명운동을 펼치고 있다.

주민교회 30돌 축하잔치는 오전 11시에 '민중의 수레를 끌고, 새 하늘과 새 땅으로'라는 주제로 성남 시민회관 소강당에서 열린다. 문동환 박사가 '꼴지의 함성으로 열어 가는 생명세계'을 주제로 기념강연을 한다. 이후 주민교회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역사비디오 상영과 문화공연이 이어진다.

오후 2시에 '반전평화를 위한 성남시민 통일마라톤'이 열린다. 외국인 노동자·중국동포·장애인 등 500여 명의 시민이 참여할 예정이다. 통일마라톤은 장애인을 포함해 5인 1조로 구성돼 진행된다. 코스 중간에 '반전평화'로 4행시 짓기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운영된다.

이해학 목사는 "이 시대의 교회가 사회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생각하면서 기념행사를 준비했다"면서 "주민교회는 앞으로도 통일운동, 생명공동체운동, 민주화운동을 지속적으로 펼쳐갈 것이다"고 말했다
* 출처 : 뉴스앤조이(www.newsnjo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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